꼭 알고 싶은 기독교 교리
나용화 교수
(개신대학원대학교)
1.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는 상징적인가? 실제적인가?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내려가심)를 상징적으로 보고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당한 심한 고통으로 해석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답). 그러면, 지옥강하는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행악자에게 말씀하신 대로(눅 23:43)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바로 그 날 그와 함께 낙원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는 사실상 가실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칼빈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는 영이시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순간에도 온 우주에 충만하게 계시고(기독교강요 2권 12장 4절), 그의 성찬에도 영으로 실제로 임재해 계실 수 있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30절). 그는 부활한 몸이기에 낙원에 계시면서도 지옥에 내려가 계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 교리를 뒷받침하는 베드로의 설교와 서신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2장 23절과 24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말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는 말이 이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사실이듯이, 그가 사망의 고통을 당하신 것과 그 고통에서 풀려 부활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2:31~36에서 음부에 버려졌으나 그의 육체가 썩지 않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만일 칼빈의 해석대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던 때 당한 고통이 지옥강하를 의미한다고 하면, 베드로가 “사망의 고통”을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이후의 사건으로 언급한 것과 모순이 된다. 어떻게 사망 후에 당한 고통을 십자가 상에서 당한 고통과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그의 서신(벧전 3:18~22)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말했다. 그는 먼저 베드로전서 3:18 하반절에서 그리스도가 육체로는(즉, 육적 존재 방식으로는; 참조, 롬 1:3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했으나 영으로는(즉, 영적 존재 방식으로는; 참조,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주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장차 있을 전면적 결정적 심판을) 선포하셨다” (벧전 3:19)고 했다. 다시 말해서, 몸을 떠난 영으로서(참고, 눅 23:46) 예수 그리스도는 노아시대의 심판 받은 바 불순종의 사람들처럼 지옥에서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로 내려가시어 전면적인 심판 (벧전 3:20~21)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지옥에서 사망의 고통도 당하셨다(행 2:24).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지옥강하는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망의 고통을 당하시는 한편, 불순종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한 역사적 사실이다(참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50문답; 박형룡, 「교의신학」 4권 기독론, 184~185).
2. “이신칭의”는 단회적인가? 구원의 과정인가?
박형룡의 「교의신학」 제 5권(구원론, p.278)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곧 이신 칭의는 법정적 선언적일 뿐 아니라, “즉각 완전 최종적”이다. 죄용서를 즉각적으로 받고 하나님께 열납되어 정죄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에 완전히 참여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형룡이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이신칭의는 신분의 변화로서 단번에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신칭의 교리의 실례로 삼은 로마서 4장에 언급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자. 로마서 4장 3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했고, 로마서 4장 22절에서는 창세기 17장 이후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말했다. 특별히 로마서 4장 17절의 “죽은 자를 살리시며”는 히브리서 11장 19절과 연관지어 보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건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고 표현한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 아브라함에게 선언된 이신칭의는 적어도 창세기 15장으로부터 22장까지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4장 3절과 22절에서 반복적으로 칭의를 선언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보여준 믿음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보았다.
요약하자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15장에서 그리고 17장으로부터 22장에 이르기까지에서, 아니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창세기 15장 6절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히브리어의 경우 현재완료형 동사가 쓰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여러 가지 시련과 훈련을 통하여 연단되는 가운데 처음부터 꾸준하게 믿어왔고, 앞으로도 평생 참되게 지속될 수 있는 믿음으로, 그리고 특별히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 또한, 창세기 22장에서 보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실 것을 믿은 아브라함의 경우, 그리스도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신 것을 믿었던 것이다(참고, 롬 4:25)
다윗의 경우도, 골리앗을 죽였을 때의 믿음뿐 아니라 밧세바와의 간음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었다.
이런 까닭에, 칼빈은 칭의의 법정적 선언의 성격을 강조하는 한편, 칭의를 성화와 동시적으로 함께 얻어 누리는 구원의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참고, 칼빈 「기독교강요」 3권 14장 11절; 「로마서」 269). 레이몬드는 창세기 12장의 경우를 실제적 칭의, 창세기 15장의 경우는 선언적 칭의, 그리고 창세기 22장의 경우는 증명적 칭의로 정의함으로써, 칭의를 평생에 걸친 과정으로 이해하였다(로버트 L. 레이몬드, 「바울의 생애와 신학」 541-542).
3. “심령 천국”은 성경적인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누가복음 17:20~21과 로마서 14:17에 근거하여 심령 천국을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분들의 해석대로 “심령 천국”은 성경적인가?
우선 누가복음 17:20~21을 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이 본문에서 “너희 가운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령 천국을 주장하는 분들의 해석대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을 의미 하는가? 아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맥상 바리새인들의 심령 속에 천국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오해인 것이다.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복음 사역 곧 복음선포와 죄용서의 은혜 선포와 병든 자들을 고치고 불쌍히 여겨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일들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목전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바 천국은 심령에 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미 임한 천국이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주님의 통치가 임하여 어두움의 악한 영들의 지배가 꺾이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골 2:15).
바울의 로마서 14:17의 말씀도 심령 천국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서로 덕을 세우고 화평의 일을 힘쓰는 가운데 성도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바 성도들의 교제 속에 임하는 그 나라가 바로 천국이다.
“심령 천국”을 주장하게 되며, 성도들의 교제(communion of saints)인 교회 안에 임하는 천국을 소홀히 하게 될 뿐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으로 천국 운동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상실하게 되고 만다.
사실, “심령 천국” 교리로 인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세상 속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으며, 사후의 내세 천국만을 주로 소망케 되었다. 즉, 교회를 위한 교회가 되었고,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변혁시킨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4. “영혼 구원”은 성경적인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보는 자들은 육체를 죄의 행위자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영혼만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거룩케 하여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해석에 의하면,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도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요, 육체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영혼만 평안하면 되기 때문에 몸은 병들거나 쇠약하더라도 괜찮으며, 이로써 그릇된 금욕주의로 기울게 된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소흘히 한다. 즉, 건강도, 직업도, 가정도, 학업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정치와 경제 등에서 초월해야 신령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삶의 체계(life system)이다. 복음은 우리의 삶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 삶의 변혁이 일어난다. 우리 인간은 영육통일체이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고 구원한다. 영혼만이 아니라, 인생 자체를 하나님은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모든 일에 잘되고 (육체도) 강건하기를 바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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